
우리나라 톱을 달리는 봉준호 감독의 새로운 영화가 나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영화관을 거의 찾지 않는 나조차 들뜬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가 빗어낸 작품인 영화 설국열차와 기생충이 그려낸 서사는 가벼이 볼 수 있으면서도, 스크린을 등지고 나섰을 때 무언가 고민하게 만드는 특별한 매력이 있어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 명작으로 남아있다.
그런 까닭에, 그가 준비한 새로운 작품이 또 어떤 사회적, 인간적 혹은 전혀 새로운 인간사의 심층부를 무기로 삼아 무뎌져있던 청자의 감정 한구석을 향해 시위를 당길 지 무척이나 기대가 될 수밖에는 없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장르 정도는 찾아볼 법도 한데, 심지어 장르조차 새로이 창조할 만큼의 잠재력을 가졌다고 내심 평가하고 있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기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스크린 앞에 앉았다.

미키 17의 주요 출연진



영화를 보게 된 이유와는 전혀 연관이 없지만, 출연진 이야기를 빼놓고 갈 수는 없다. 영화 포스터에서 스치듯이 마주했던 주인공 미키를 연기하는 배우는 놀랍게도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열연하여 많은 사랑을 받은 배우, 로버트 패틴슨이었으며 영원한 어벤저스 헐크를 연기한 마크 러팔로, 워킹데드 시리즈를 통해 큰 사랑을 받은 스티븐 연 등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배우진이 모두 미키 17 속 주요 인물이 되어 열연한다.
워낙에 유명하고 경력있는 배우들이다 보니, 연기력 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다. 섹시하면서도 다크 한 이미지가 각인되어 있는 로버트 패틴슨이 펼치는 찌질남의 연기는 사람이 달라 보일 정도로 뛰어났고, 이어서 마크 러팔로의 지질한 지도자 케네스 마샬 연기, 스티븐 연의 지질한 배신자 티모 연기도 각자 맡은 역할을 잘 살린 좋은 연기였던 것 같다.
이밖에도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톡톡 튀며 살아 숨쉬는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이 많았는데, 2시간 30분가량의 긴 시간을 이끌어가는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지 않았나 싶다.
줄거리
주인공 미키는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고아가 되고, 뒷골목을 전전하며 힘겨운 삶을 보낸다. 친구란 없을 것만 같을 정도로 병약하고 내향적인 그에게도 유일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라는 놈의 꼬임에 넘어가 무리하게 동반 사업을 시도하다가 폭삭 망해버린다.
심지어 돈을 갚지 않으면 사람을 토막내버리는 잔악무도한 사채업자들에게 갚을 수 없는 빚까지 진 상황에서, '지구에 있다면 어디든 쫓아가 반드시 잡아낸다.'라는 사채업자의 말에 '그럼 지구만 아니면...?' 하는 생각이 든 미키는 끊임없이 죽고,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익스펜더블(expendable)이라는 존재가 되어 우주 원정을 나서는 개척선에 몸을 싣는다.
아래부터는 영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단순한 캐릭터 구성

봉준호 감독의 작품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한다면, 캐릭터들이 가진 입체적인 내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감정들과 그로 인해 벌어지는 상황들이다. 일면식도 없는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에 의문을 품게 만들다가도, 그(그녀)의 감정과 행동의 근원에는 무엇이 있나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서서히 빠져들게 만드는 그의 서사는 그래서 더욱더 시청자들로 하여금 긴장하고 몰입하며 가슴속에 여운을 품게 만든다.
하지만 미키17의 인물들은 전작들과 비교하면 꽤나 평면적으로 그려진다. 앞서 '지질함'을 강조한 이유가 있는데, 주요 인물들 대부분이 그러한 지질함을 베이스로 하여 큰 기복 없는 서사를 보여준다.
주인공 미키가 가혹한 운명을 걷게 만든 장본인이자, 친구의 친자도 아까운 인물인 티모는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권모술수로 무장한 전형적인 파렴치한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얄미움 담당은 탁월하게 해냈지만, 노골적으로 얄미움만으로 그려진 캐릭터였다.
또한 개척우주선 내 최고의 권력자이자, 민중을 이용해먹는 타락한 정치인의 표상인 케네스 마샬은 사실 중요한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스스로 하지 못하고 아내인 일파 마샬의 말에 의존하는 마마보이적인 캐릭터를 꾸준히 만들어가다가 극의 절정에서 마무리된다.
이처럼 극의 주요한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들의 평면적인 묘사는 이야기의 구성이 지나치게 복잡해지는 것을 방지했다는 점에서 좋았을 수 있지만, 배우들이 가진 뛰어난 연기 능력만큼의 넓은 이야기를 부여하지 못해 단조로운 인물들을 만들어낸 것 같아 많이 아쉬웠다.
다소 억지스러운 전개 방식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 꼭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다양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다만, 미키17에서 택한 방식은 어딘지 모르게 억지스러운 느낌이 든다. 물론, 만약에 봉준호 감독이 미키 17을, 인간 극장과 같은 인간 다큐멘터리 느낌으로 전개해 나가길 의도한 것이라면 유의미한 성공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2시간 30분 가량의 긴 러닝타임을 갖는 영화이다 보니 작품의 군데군데 긴장감을 끌어올리거나 극의 분위기를 전환시키기 위한 요소와 포인트가 여럿 있는데, 이러한 지점에서 택한 이야기 진행 방식이 다소 맥이 빠진다. 가령, 예측할 수 없는 사건으로 인해서 이 세상에 미키가 두 명이 되어버린, 멀티플(multiple)이 된 상황이 발생하자,
미키 17 - 우린 큰 일어난 거야! 이대로라면 우린 둘 다 삭제될 거라고!
라며 일갈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무엇이 그렇게 큰 일인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아니나 다를까, 화면은 과거로 전환되어, 이대로라면 삭제될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각한 상황이 왜 심각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일화가 전개된다.
감독은 이를 통해서 미키라는 인물이 유일무이한 익스펜더블이자, 유일무이해야만 하는 고독한 존재가 되었음을 전달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심오한 뜻이 녹아있거나 간에, 스크린을 마주하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으로서는 '아하 그렇구나'라는 다소 김 빠진 감상밖에는 전달받지 못했다. 작품이 의도했을지도 모르는 '아이고 저런! 미키에게 엄청 큰일이 났는데 어떡하지?'라는 반응이 나오기에는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충분히 맛보고 있는 30대에게는 다소 밋밋한 감상이었다.

또한, 자신의 심각한 상황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던 미키가 마침내 그 정체를 들키는 순간에, 정체를 알게 된 대상은 바로 고독한 미키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되어주던 히로인 나샤인데, 미키18과 마약에 절어서 헤롱헤롱하며 미키라는 존재가 느끼고 있는 정체성의 혼란, 그 근간을 흔드는 말을 잘도 뱉으며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시청자와 쌓았던 히로인으로서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이때 미키에게 이끌린 또 다른 여성, 카이의 존재가 두드러지는데, 이 대목에서 카이와 미키가 쌓은 서사를 볼 때, 미키의 근원을 인정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히로인 교체의 순간임을 의심치 않을 장면이었다.
하지만 사실 나샤만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었지...
헌데, 갑자기 정실은 사실 나샤임!을 외치는 듯, 나샤와의 회상 장면이 그려지는데 사실 미키가 거듭된 죽음을 맞이할 때마다 누구보다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다는 신파를 입히며 나샤와의 관계가 또 갑자기 엄청난 세기로 단단해진다!
이뿐만 아니라, 미키18이라는 존재가 가지는 정체성에 대한 이유도, 먼저 상황을 만들어버린 뒤 이유를 해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것이 비록 상황에 대한 납득은 될지언정 극 전개의 긴장감에 동조되어 심장의 RPM을 올리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치, 인간 극장에서 관찰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 갑자기 어떤 일을 저질러버리는데, 장면이 멈추고는
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딴따라다라다라다라다라단, 딴따라다라다라다라다라단...)
하며 끝나버리는 장면처럼, 인간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전개 방식을 그대로 채용한 구성이었다.
설마... 아니죠...?

전술하였듯, 몇가지 극 전개의 억지스러움이 있고, 특히나 히로인 교체의 순간을 뒤틀어버린 역발상 전개 등등의 불편함은 조금 쓸데없는 의심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1. 극 중 남성 인물들은 모두 무능하거나, 찌질하거나, 과하게 수동적임. 반면에 극 중에서 상황을 만들어가는 핵심적인 인물들은 대부분 여성임.
2. 카이(백인 여성)과의 서사로 갈아타는 듯하다가, 갑자기 노선을 틀어서 나샤(흑인 여성)가 메인 히로인을 공고히 하며 마침표를 찍는 역할을 수행함.
물론 영화의 전부를 위의 두 가지로 묘사할 수는 없겠지만, 부자연스러운 전개를 쫓아가다 보면 위의 두 문제가 조금씩 눈에 보이게 되는 것 같아 아쉽다. (이거 혹시...?)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와 전달을 위한 소재, 그리고 봉준호 감독 특유의 그로테스크함이 버무러진 미키 17이 꽂는 메시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볼만한 훌륭한 작품이다. 다만 왠지 모를 부족한 2%는, 그가 봉준호이기에 조금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비록 내 개인적인 감상은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한 면이 없지 않지만, 베를린 영화제에서 기립 박수를 받으며 호평을 받았다고 하는만큼, 볼만한 영화이자, 볼 게 많지 않던 요즘, 영화관을 들르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오랜만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영화인만큼, 100만을 넘어 1000만까지 꾸준히 올라가길 바라며 리뷰를 마친다.
